여성 래퍼 키디비(본명 김보미·27)가 래퍼 블랙넛(본명 김대웅·28)이 노래 가사에서 반복해 자신에게 수치심을 줬다며 강경 대응을 예고해 인터넷이 뜨겁다.
키디비가 지난 6일 자신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저도 여잔데 상처받았다"고 토로하자 블랙넛의 가사가 힙합의 '디스'(Diss) 문화로 치부하기에는 선을 넘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디스는 '디스리스펙트'(Disrespect)의 줄임말로, 주로 힙합계에서 랩으로 특정 인물을 공격하는 것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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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넷 `쇼미더머니`의 한 장면 (사진=엠넷) |
또 일부 래퍼의 사회 정서에 반하는 무차별적인 랩이 힙합 문화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이 장르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청소년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지적도 있다.
◇ 표현의 자유에 디스 문화?…"성희롱, 힙합이라 옹호 어려워"
키디비의 소속사 브랜뉴뮤직 측은 7일 "키디비가 무척 상처를 받았다"며 "블랙넛의 자극적인 랩에 이름이 반복해 오르내리는 상황을 힘들어해 법적인 대응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블랙넛이 랩 가사로 논란이 된 전력은 처음이 아니다.
엠넷 '쇼미더머니 4' 녹화 때는 선정적인 랩과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를 해 해당 장면이 삭제되기도 했고, 과거 선보인 랩에서는 여성 비하는 물론 강간과 살인을 연상시키는 폭력적인 가사로 충격을 줬다.
그로 인해 인터넷에서는 창작의 자유와 디스의 허용수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놓고 설전이 뜨겁다.
누리꾼 중에는 '아무리 힙합 문화이고 디스라지만 지켜야 할 선은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하에 성희롱도 자유롭게 한다면 누구나 랩으로 성희롱하겠네?'(아이디 nsu2****)라는 견해를 내는가 하면, '블랙넛이 사과할 게 뭐냐? 차라리 맞디스를 해'(kaka****)라고 블랙넛을 두둔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우리 사회가 직설적인 비판에 소극적인데 근거가 있는 직설적인 비판은 표현의 자유로 보호돼야 하지만 인신공격으로 넘어가거나 여성에 대해 성희롱을 한다면 표현의 자유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특히 일부는 힙합이란 명목하에 욕설과 자극적인 표현으로 캐릭터를 만들고 마케팅 포인트로 삼는 경우도 있다"며 "자극적인 이슈로 주목받으려는 것을 힙합 정신으로 옹호해주긴 어렵다"고 덧붙였다.
강일권 음악평론가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힙합이니까'란 말은 절대 모든 것을 방어하는 치트키가 될 수 없다"며 "일례로 누군가를 성적 대상화 한 가사가 그저 성적 농담이 되느냐, 성추행이 되느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대상화된 이의 판단을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한다. 상대가 모욕감을 느끼고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 그것은 성추행의 영역에 들어간다. 만약 그 주체가 래퍼라면 힙합을 방어막 삼아 가하는 성추행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 음담패설 수준 랩 가사 쏟아져…"대중화된 랩, 책임도 따라"
이 논란을 확대해 보면 블랙넛뿐 아니라 일부 인디 래퍼들이 맥락 없이 쏟아낸 욕설과 선정성이 뒤얽힌 랩을 인터넷 공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모든 음악인에게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음담패설 수준의 랩이 때론 디스로, 때론 허세(swag)로 포장돼 소비되고 있다.
특히 몇 년 전부터 엠넷 '쇼미더머니'와 '고등래퍼' 등의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큰 인기를 끌면서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층에 힙합의 영향력이 확대된 상황. 인디 래퍼들이 방송을 통해 주류 시장으로 나오고, '고등래퍼' 출연 10대 래퍼들까지 '잘돼서 돈 벌고 여자 만날 것'이란 가사를 쏟아내니 걱정스러운 시선이 있다.
한국청소년연맹 황경주 사무총장은 "힙합이나 관련 프로그램은 특히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장르"라며 "청소년들은 래퍼를 우상화하며 이들의 말투, 행동 등을 따라 하고 싶어 하고 이들의 메시지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욕설이 난무하고 선정적인 랩 가사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재 가사 심의는 각 방송사가 프로그램에 내보낼 곡들을 자체 심의하거나, 여성가족부의 청소년보호위원회가 민간으로 구성한 음반심의위원회를 운영해 비속어와 욕설, 선정성, 유해약물 등을 기준으로 심의해 매월 청소년유해매체물을 고시한다. 청소년유해매체물 판정을 받은 음반은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19세 미만 판매금지'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음악사이트에 배포된 음원은 '청소년유해'('19금') 표기를 해야 한다. 여성가족부 홈페이지 고시된 청소년유해매체물을 살펴보면 국내 곡의 경우 대다수가 힙합이다.
그러나 한 인디 래퍼는 "솔직히 심의에 구애받지 않는다"며 "우린 방송 출연 기회도 없을뿐더러 관심도 없다. 여성가족부 심의 역시 음원 공개 이후 진행돼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수 래퍼는 대중 속에 자리 잡은 힙합이 더욱 탄탄한 시장을 형성하려면 표현의 자유에 비례해 그에 따른 책임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지금의 힙합 시장은 그런 점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엠넷 '쇼미더머니 6' 녹화 차 미국 뉴욕에 있는 래퍼 비지는 "음악을 통해 무언가를 풍자하고 패러디하는 표현의 권리는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 만큼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과거에는 허용됐던 비방이나, 소수자 혹은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들은 이제는 적절치 않다는 사회적 합의가 세계적으로 이뤄졌다"며 "특히 디스 문화란 잣대에 숨어 특정인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성적 수치심을 주고 상처 주는 비겁한 행동은 고쳐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유명 래퍼도 "가사의 공감대가 힙합 문화가 가진 핵심 매력 중 하나인데 요즘은 그런 가사를 찾아보기 어렵다"며 "몇년 사이 대중화된 힙합 시장이 꾸준히 사랑받으려면 우리부터 변화해야 한다. 특히 솔직한 자신의 얘기가 아니라 트래비스 스콧, 릴 야티 등 미국의 '핫'한 래퍼들을 모방해 자극적인 랩을 하는 겉멋 든 래퍼들도 있는데 사회· 도덕적인 관념과 문화의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