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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며
이해준 정치부장

“가자, 조국의 아들들이여…피의 깃발이 올려졌나니...야만적인 적군을 무찌르자…적의 더러운 피가/우리 들판을 흐를지니/조국의 신성한 수호신이/복수심에 불타는 우리 군대를 보살피리라…”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이 노래는 ‘출정가’로 알려진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이유’의 일부다. 근대 시민혁명의 원조인 프랑스혁명이 진행 중이던 1792년 만들어져 시민군 행진가로 불려졌다. 이후 지나치게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한때 금지되기도 했지만, 다시 국가로 채택돼 2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공식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 노래가 장엄하게 울려퍼진다.

오늘날 프랑스 국민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민주 제단에 뿌려진 선조들의 희생을 얼마나 되새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노래에 짙게 배어 있는 피의 냄새는 민주주의 정착이 얼마나 힘든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혁명과 반혁명을 거쳤던 프랑스 혁명 자체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이후 민주주의 역사를 보더라도 앙시앙 레짐(구체제) 세력들은 수시로 반동의 고개를 내밀었다. 이후 내용상의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새로운 갈등과 이해관계의 충돌을 평화적으로 조정하는 절차와 문화를 만들어가면서 진화해왔다.

최근 튀니지와 이집트를 거쳐 리비아와 예멘, 바레인, 이란 등에서 벌어지는 민주화 투쟁도 마찬가지다.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가다피는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총칼을 들이대며 참극을 연출하고 있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구체제를 전복시키며 소중한 승리의 경험을 안긴 아랍 민주화 열풍도 리비아에 막혀 주춤거리고 있다. 헌법 제정이나 의회 구성, 국가지도자의 선출 등 형식적 민주 절차를 마련하는 데조차 쉽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독재자를 축출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민주화의 새로운 출발일 뿐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당장 국민생활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민주절차가 확립되고 새로운 정치ㆍ경제 질서를 만드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역사적으로 새 사회의 건설은 기존질서의 파괴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다. 당장 구체제의 잔재 청산부터가 문제다. 예를 들어 42년 가다피의 철권통치 기간은 36년 일제강점 기간보다 더 길었다. 해방 후 60년이 넘도록 일제 잔재의 망령에 시달려온 한국사회를 볼 때, 수십년 독재를 경험한 아랍권에 놓인 과제는 더 심각할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민주주의도 진행중이다. 1970년대의 부단한 민주화 투쟁, 80년 서울과 광주의 봄, 87년과 90년 민주화 운동을 거쳐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피를 흘렸지만,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사회적 갈등, 이해관계의 충돌이 민주적 해법을 요구하고 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공동체의 파괴,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의 패배자들과 이들을 배제하는 사회 분위기, 갈수록 심화하는 양극화 등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이 수없이 많다. 이를 풀어내는 민주적 절차와 문화를 정착시키고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한국사회도 심한 파열음을 낼 것이다. 특히 최대 문제인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문화를 만들지 못할 경우 한국사회도 아랍권의 자기분열과 같은 심각한 갈등에 빠질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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