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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병기 연예톡톡]SF 영화 ‘정이’, 신파와 휴머니즘 사이
부비부비는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이 SF장르물의 의미를 막을 수 있나

※스포일러 있습니다

[헤럴드 경제=서병기 선임기자]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SF영화 ‘정이’가 지난 20일 공개 이후 나흘간 세계 1위를 차지하는 등 글로벌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국내의 영화 관련 사이트 리뷰 평점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혹평의 이유는 모성애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평면적이고 단순한 신파라는 점이다.

신파라는 단어는 포괄적이고 막연하다. ‘정이’의 신파성을 좀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정이’는 미래의 A.I. 세계에서도 돈의 가치보다 휴머니즘의 가치가 더 위에 있어야 함을 역설하는 작품이다.

그 휴머니즘 가치가 엄마와 딸이라는 가족간 끌림, 눈물 등으로 나타난다. 이걸 단순히 신파라고 한다면 서양 사람들이 ‘정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이 아드리안의 신식 짐보의 화력에 반했을 리는 없다.

물론 ‘정이’가 입체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SF물은 아니다. 연상호 감독은 뛰어난 작품을 내놓기도 하지만 용두사미 작품들도 간혹 나온다. 작품 수가 너무 많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이’는 꽤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정이’의 첫장면에서 작품의 배경을 소개하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스포일러지만,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이어서 상술한다.

“가까운 미래에,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류는 우주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지구와 달의 궤도면 사이에 인류가 살 수 있는 ‘쉘터’를 만드는데 성공한 인류는 수십 년에 걸쳐 80개 ‘쉘터’에 인류를 이주시킨다. 인류가 ‘쉘터’에 자리를 잡아갈 무렵, ‘쉘터’ 8,12,13호는 스스로를 ‘아드리안 자치국’으로 선언하고 지구와 다른 ‘쉘터’에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그로 인해 연합군과 아드리안 사이의 전쟁은 몇십년동안 이어졌다. 지구에 남겨진 인류는 이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며 전쟁의 부속품과 같은 생활을 이어간다.”

윤정이(김현주)는 이 내전에서 연합군 최고의 용병이다. 정이가 용병으로 출동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딸 윤서현(강수현)이 어릴때 걸렸던 폐종양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정이는 수많은 작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단 한 번의 작전 실패로 식물인간이 됐다. 군수 A.I. 개발 회사 크로노이드 연구소는 그녀의 뇌를 복제해 최고의 A.I. 전투 용병으로 개발한다. 이 전투 A.I. 개발 팀장이 정이의 딸 서현(강수현)이다.

크로노이드는 “좋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이라고 하지만 미래에도 자본의 지배력은 더욱 높아지며 인간성이 말살될 가능성이 농후함을 영화는 잘 보여준다. 그것은 두 가지 지점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용병은 죽고나면 자신의 뇌를 복제하는 3가지 방식중 한가지를 선택해 살아있을 때 크로노이드와 계약하는데, 3가지 타입이 있다. 많은 돈을 지불하면 뇌복제를 통해 인간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는 A 타입을 선택할 수 있지만, B타입은 기본권의 제약을 받는다. C타입은 뇌 데이터를 모두 넘기고 비슷한 클론들을 무수히 만들어내므로 인간 대우를 못받는다. 대신 C타입은 무료이며 지원금까지 받을 수 있다.

정이는 폐종양 치료비가 많이 드는 딸을 위해 C타입을 선택해 죽고나서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 딸은 이런 과정을 지켜보며 심정의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는데, 이제는 고인(故人)이 된 강수연은 AI처럼 차갑고 기계적인 모습을 한 연구원에서 시작해 엄마의 아픔과 치욕을 맞딱뜨리며 고뇌하는 감정연기를 잘해냈다.

전쟁이 시들해지자 크로노이드는 전투 A.I. 정이를 가사도우미 AI나 서비스 AI 개발로 바꾸려고 한다. “옛날에도 전쟁의 시대가 끝나면, 그 기술 가져다가 보온병 만들고 그랬잖아”(크로노이드 회장) 심지어 정이를 성적으로 활용할만한 선정적인 실험까지 한다. C타입은 뭐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자본의 힘은 AI시대에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발휘한다. 이걸 지켜보는 딸의 심정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크로로이드 회장이 뇌복제 AI를 만드는 목표는 자신의 뇌를 복제해 영생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게 까칠한 성격의 크로노이드 연구소장 김상훈(류경수)이다.

“나는 그냥 죽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처음 만든 AI 상훈이가 내가 아니거든. 나라는 생각이 안들어. 적당히 조작해 수족처럼 부리는 거지”(크로노이드 회장)

이 말은 AI 시대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로봇을 별 생각 없이 다룰 수 있는 위험성,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암시하기도 한다.

‘정이’의 후반 극적인 장치는 ‘미확인 영역’ 설정이다. AI 정이의 기능영역중 전투의지와 고통수치 등을 연구원들이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데, 미확인 영역이 활성화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서현은 그 비밀을 알아냈다. “우리 딸이 수술이 끝났어요. 끝나면 꼭 옆에 있어주고 싶었는데. 우리 딸이 날 지켜준다며 인형을 줬는데..”

과거 정이가 딸과 수술실 앞에서 했던 이 말을 할때 미확인 영역이 활성화됐다. 서현은 AI정이에게서 딸 기억을 지워버렸다. “자신만 생각하고 살아요. 최대한 멀리 떠나요. 가요. 빨리”

정이는 딸 때문에 고난을 자초했다. 딸의 치료비를 벌기위해 용병을 자원했으며, 뇌복제 조건도 돈이 안들고 지원금이 나오는 C타입을 선택했다. 그 결과로 온갖 자본의 논리로 자신의 몸이 이용당한다. 그래서 딸이 엄마의 딸 기억을 직접 지우는 이유는 눈물겹다.

AI정이가 서현에게 과거 수술실에 들어갈때 했던 부비부비를 하고 떠나는 엔딩에서는 눈물이 나오지만 억지로 짜낸 눈물이 아니다. 이건 신파가 아니다. 부비부비는 휴머니즘이다. 서현이 엄마 AI정이에게 했던 말, “이 세상 행운이 함께 하길”을 나도 엄마 정이에게 해주고 싶었다.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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