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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최고 韓 성악가…한국 오면 일이 없어요”…한국 오페라계 현실은?
6개 오페라단 수장 인터뷰
“韓 오페라 발전, 인재 발굴
위한 사명감과 책임감”
적자 감수하고 버틴 동력 
 
고리타분한 이야기와 음악
부정확한 발음에 발연기
오페라 향한 뼈아픈 외면
저변 확대ㆍ팬덤 확보 위해
쉬운 우리말의 창작 작품
어린이 오페라로 교육해야
라벨라오페라단은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 시리즈로 ‘안나 볼레나’(2015), ‘마리아 스투아르다’(2019)를 국내 초연한 후, 마지막 여정으로 최근 ‘로베르토 데브뢰’(2023)를 선보였다. 김숙영 연출가는 “대본을 생각 없이 읽는 사람과 생각하고 읽는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며 “없었던 일도 상상하게 할 수 있도록 성악가를 트레이닝하는 데에 주력했다”고 말했다.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011년 동양인 최초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소프라노 홍혜란, 2014년 그 뒤를 이어 우승한 황수미, 2023년 아시아 남성 성악가 최초로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김태한….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최초’ 타이틀의 우승자를 줄줄이 배출하고, 한 해에 1000명의 오페라 가수들이 나오는 전 세계 유일무이한 나라. ‘한국의 성악가’들을 향한 세계 무대의 극찬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0년 후 전 세계 오페라 극장은 한국 가수가 없으면 문을 닫을 거란 이야기가 나올 만큼 우리는 인프라가 구축됐어요. 그런데 그 아까운 보석들이 한국에 오면 할 일이 없어요.” (이강호 라벨라오페라단 단장)

1948년 1월, 서울 명동의 예술극장 시공관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가 막을 올렸다. ‘한국 오페라’의 시작이었다. 전석 매진을 기록한 첫 오페라의 등장에 오페라계는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춘희’가 막을 올리며 엄청난 관객들이 모여들었어요. 2년 뒤 최초의 창작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춘향전’이 막을 올렸죠. 전쟁의 와중에도 국민들에게 위로를 주자며 일종의 ‘오페라 운동’을 시작한 거예요.” (장수동 서울오페라앙상블 단장)

한국 오페라사 75년. 무수히 많은 민간 오페라단이 태어났다. 현재 대한민국오페라단연합회에 등록된 민간 오페라단은 120여개. 한국인 성악가들이 세계 유수 극장을 섭렵, 한국은 ‘노래의 나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국내 오페라 환경은 다르다. 탄탄한 지원을 받는 국립오페라단과 달리 민간의 오페라 단체는 놀랍도록 열악하다. 오페라 가수들은 설 무대를 찾기도 힘들다. 심지어 대중에게 오페라는 ‘소수의 예술’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이 따라 다닌다.

이강호 라벨라오페라단 단장, 장수동 서울오페라앙상블 단장, 지은주 대전오페라단, 양수화 글로리아오페라단 단장, 육성호 아트로 대표, 박경태 오페라팩토리 대표(왼쪽부터) [대한민국 오페라축제추진단 사무국 제공]

■ 어려운 이야기·고리타분한 음악…오페라 외면, 왜?

오페라의 경쟁 상대는 너무도 많다. 바로 옆 극장에선 수백원대의 제작비를 들인 화려한 무대와 중독성 강한 음악, 강력한 ‘티켓 파워’의 스타 배우로 무장한 뮤지컬이 기다린다. 무대 밖엔 볼거리가 넘쳐난다. 공연장의 경쟁자는 “넷플릭스와 같은 OTT”라는 목소리가 커지는 때에 ‘경쟁 최약체’의 오페라는 사정이 더 안 좋을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성악가들이 총출동하는 작품이 아니고서야 오페라는 대중의 ‘관심 밖 콘텐츠’다.

업계에선 첫 오페라 ‘춘희’가 막을 올리고, ‘오페라 운동’이 시작되던 70여년 전이 ‘한국 오페라계의 전성기’였다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오페라는 어렵다’는 편견,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관객의 진입장벽을 높였다. 한국 오페라계의 큰 형님 격인 글로리아 오페라단의 양수화 단장은 “어려운 외국어로 쓴 100여년 이야기가 20~30대 관객들의 정서에는 와닿지 않을 것”이라며 “고전을 읽기 위해선 책 자체가 재밌어야 하는데 현시대에선 공감과 이해가 어려운 스토리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라고 했다. 자막과 무대를 번걸아 가면서 봐야 하는 피로감은 클래식 오페라에 대한 부담을 높인다. 어우러지는 음악도 쉽지만은 않다. 직설적인 대중음악과 달리 ‘아는 만큼 들리는’ 클래식 음악의 특성상 고리타분하게 받아들여지기 일쑤다.

글로리아오페라단 ‘라트라비아타’ [대한민국오페라축제 사무국 제공]

오페라를 향한 대중의 반응은 뼈아프다. 클래식계의 ‘종합예술’이라는 자부심과 ‘곰탕 같은 깊은 맛’을 담았다는 자신감으로 만든 무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오페라는 하루 아침에 일군 성취가 아니다. 민간의 단체들이 ‘사명감’ 하나로 오늘의 예술세계를 다졌다. 오페라 한 편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최소 3억 5000만원~4억원이 들어가지만, 민간 단체의 경우 말 그대로 ‘없는 살림’을 쪼개 ‘수익과 무관한’ 제작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주 대전오페라단 단장은 “한국의 오페라는 대대로 선배들의 오페라에 대한 열정과 음악에 대한 육성사업에 대한 희생으로 쌓아 올렸다”며 “후배 성악가들을 위해 설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수많은 민간 단체가 생겨났고, 지금도 계속 되는 희생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통의 가치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 오페라 발전’이라는 공동의 목표는 창작자, 성악가를 한데 뭉치게 했다. 하지만, 강산이 일곱 번은 변하는 동안 시대도 달라졌다. 업계의 수장들은 “이전엔 모두가 한 마음으로 오페라 운동에 동참했지만, 지금의 MZ세대에겐 사명감과 책임감을 강요할 수 없는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오페라계를 지켜온 제작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강호 단장 역시 “매해 수많은 성악가들이 나오지만, 상위 2~3%에 들 만큼 이름을 날리거나 대학 교수가 되지 않으면 이들의 무대가 없다”며 “재능있는 성악가들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페라 팩토리의 ‘빨간 모자와 늑대’ [대한민국오페라축제 사무국 제공]

■ ‘팬덤 확보’ 위해 쉽고 재밌게…오페라 교육·인프라 확보 필수

다양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선 ‘대중화’가 필수적이다. 오페라계에서도 ‘대중화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대한민국에 오페라 관객이 10만 명만 됐으면 좋겠다”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면서도 “오페라는 대중화가 어려운 장르”(육성호 아트로 대표)라는 공통의 의견이 따라온다. 대신 “대중의 오페라화”를 위해 서서히 ‘스며드는 전략’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특히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육성호 아트로 대표는 “마니아와 팬덤의 확보는 교육에서 시작된다”며 “어린 시절 감상한 오페라가 차곡차곡 쌓였을 때 마니아 층이 형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은주 단장도 “오페라를 오페라답게 만드는 전통을 살리되, 교육을 통해 오페라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도 저마다 자구책을 찾았다. 관객 확장을 위한 실험과 도전이 물 밑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팬덤의 확보’와 ‘저변 확대’를 위한 노력이다. 어려운 외국어가 아닌 우리말로 쓰인 창작 오페라를 제작하고, 어린이들을 위한 ‘오페라 교육’을 꾀한다.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6월 25일까지)에서 오페라팩토리가 선보인 어린이 뮤지컬 ‘혹부리 할아버지의 노래주머니’와 ‘빨간모자와 늑대’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아우르며 호평이 이어졌다. 작품에선 20세기 미국 작곡가 바랍의 세계적인 히트작 ‘빨간 모자’를 번안한 ‘빨간 모자와 늑대’는 피아노, 플루트, 타악기로 구성된 압축된 음악 편성에 전화벨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등의 요소로 재미를 가미했다. 대중성과 오페라 교육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박경태 오페라팩토리 대표는 “철저한 마니아 층의 확대와 교육이 필요하다”며 “대중이 좋아할 수 있는 주제로 쉽게 다가가, 오페라가 재밌는 장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고 했다.

서울오페라앙상블 ‘돈 조반니’ [서울오페라앙상블 제공]

오페라 가수들을 따라 다니는 연기력 논란과 부정확한 전달력도 ‘해결 과제’다. 성악가들조차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움직임이 어색하거나 가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표현의 문제는 성악가들의 숙제”라고 말한다. 최근엔 성악가들에게 정확한 발음과 연기력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지난달 막 내린 ‘로베르토 데브뢰’(라벨라오페라단)의 김숙영 연출가는 “대본을 생각 없이 읽는 사람과 생각하고 읽는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며 “없었던 일도 상상하게 할 수 있도록 성악가를 트레이닝하는 데에 주력했다”고 말했다.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선 ‘구조적인 문제’의 개선도 필요하다. 비인기 장르인 데다, ‘고가’의 티켓 가격은 관객들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요소다. 라벨라오페라단에선 이에 티켓 가격을 전석 1만 8000원에 내놓는 ‘타임 세일’로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이강호 단장은 “오페라는 어렵고 비싸다는 편견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에 한 번 와서 보면, 더 많은 오페라를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긴 안목으로 시도해봤다”고 말했다.

오페라는 극장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탄생하는 예술이다. 그만큼 다양한 극장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장수동 단장은 “현재 전국에 울릉도부터 서귀포까지 250개의 공공극장이 있다”며 “민간의 오페라 단체가 이 극장의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민간 오페라 단체 120여개가 산발적으로 존재하나, 뮤지컬처럼 ‘산업화된 기업’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이 단장은 “오페라는 가장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장르인데, 가장 제작비가 부족하다”며 “자본이 만들어질 수 있는 시장을 키우기 위해선 오페라도 한 달간의 장기 공연을 통해 손익분기점을 맞추고 오랜 시간 관객들에게 다가가 접점을 만들 수 있는 기업의 탄생이 필요하다”고 봤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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