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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발하고 신기한 ‘구두점’의 세계
국립현대무용단, ‘구두점의 나라에서’
‘구두점의 나라에서’ [국립현대무용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마주 앉은 두 대의 피아노가 쏟아질 듯한 리듬을 연주한다. 두 개의 구두점이 수열 기호 사이로 조심스레 얼굴을 내민다. 마침표, 쉼표, 느낌표, 물음표…. 어떤 의미도 소리도 갖지 못하고 문장 뒤에 조용히 따라붙던 구두점들이 깨어났다.

긴 잠에서 깨어난 구두점들은 발랄하다. 온점처럼 생긴 동그란 모자를 쓰고, 때로는 튀튀(발레리나가 작용하는 스커트)를 연상케 하는 치마를 입고 분주하게 날아오른다. 힘 자랑도 하는 구두점, 잘난 척을 하는 구두점도 있다. 그 와중에 우아한 녀석도 있다. 각양각색의 존재들이 모인 또 다른 세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기까지 끊임없이 유영하고 흔들리는 존재들이 무대를 한바탕 뒤집어놓는다.

‘구두점의 나라에서’ [국립현대무용단 제공]

국립현대무용단의 ‘구두점의 나라에서’(22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는 동명의 그림책을 원작으로 했다. 정영두 안무가와 9명의 무용수, 신동일 작곡가와 정민선 디자이너가 만나 신기하고 기발한 무대를 만들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강점은 통일감이다. 무대와 음악, 안무와 의상까지 흐트러짐 없이 하나의 세계를 구현한다. 커다란 온점, 반점을 상징하는 모자와 의상, 구두점들의 명랑한 움직임과 그것이 고스란히 투영된 음악이 무척이나 잘 어우러진다.

‘구두점의 나라에서’ [국립현대무용단 제공]

‘구두점의 나라에서’가 만든 무대는 아직 아무 것도 써내려가지 않은 백지다. 백지 위에 무수히 많은 문장이 예쁘게 정렬되기까지의 과정을 이 작품을 통해 보는 것만 같다. 문장으로 완성되기 전 구두점들이 마음껏 뛰어노는 이야기가 바로 ‘구두점의 나라에서’다.

티끌 만한 구두점의 세계는 현미경으로 보듯 수천 배를 확대한 형상으로 구현됐다. 깔끔하게 정돈된 문장 속의 구두점과 달리 훌쩍 커진 구두점들은 완벽하게 매끈한 온점도 반점도 아닌 제각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의 얼굴처럼 제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 모습이다. 움직임도 소란스럽다. 쉴 새 없이 종종거리며 휘젓고, 데구르르 구르고, 있는 힘껏 도약한다. 군무에선 장난감 병정처럼 역동적이고 귀엽다가도, 정제된 모든 문장의 형태를 강렬하게 거부하는 것만 같아 흥미롭다.

‘구두점의 나라에서’ [국립현대무용단 제공]

구두점들은 음악과 혼연일체다. 그만큼 음악의 힘이 강력하다. 무용수들의 몸짓 하나 하나가 음악을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무용수들의 몸짓을 보다가도 문득 눈을 감으면 피아노 연주만으로 구두점들의 움직임이 상상된다. 피아노는 멜로디가 아닌 리듬을 연주하는 것처럼 음표들이 마구 튀어다닌다. 의도한 불협화음이 끝도 없이 이어지다가도 금세 귀에 편안한 자리를 찾아간다. 그러다가도 난데없이 들려오는 우리 전통의 요소에 귀가 놀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구두점들의 찰나가 음악으로 구체화된다.

‘구두점의 나라에서’는 온전히 몸짓으로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고, 끝을 알 수 없는 상상력의 공간을 열어둔다. 보는 내내 시각과 청각은 흡족하면서도, 계속 해서 물음표가 생긴다. 움직임의 근원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질문을 던져도 답을 구할 수는 없다. 서사를 중요시하는 관객이라면 설명이 생략된 구두점의 세계가 다소 아쉽거나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불충분한 설명은 때론 상상력의 확장에 제동을 건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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