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필리핀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아웃사이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7일로 취임 100일을 맞는다.
필리핀 남부의 다바오시 시장 출신인 그는 선거 기간에 "범죄자 10만 명을 죽여 물고기 밥이 되도록 마닐라만에 버리겠다", "피비린내는 대통령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지난 6월 말 취임과 함께 행동에 옮겨 국내외에서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필리핀의 최대 우방인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개XX'라는 욕설을 서슴지 않는 등 자신의 정책에 비판적인 세력에 대해 거친 언행을 일삼으며 '나 홀로 행보'를 고수, 국제사회의 관심과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최우선 정책은 '마약과의 전쟁'이다. 지난 6월 30일 취임 이후 지금까지 3천600명가량의 마약 용의자가 경찰이나 자경단 등에 의해 사살됐다.
그는 60만 명의 마약 중독자가 있는 필리핀에서 마약이 국가와 가정을 파괴한다고 비난한다. 현지 여론조사기관인 SWS가 지난 6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필리핀 가구의 62%가 마약 중독자에 대한 공포감을 나타낼 정도로 마약 문제가 심각하다.
국민이 두테르테 대통령의 마약 소탕전이 인권을 무시하는 초법적 처형이라는 국내외 인권단체의 비판에도 환호하는 이유다.
여론조사업체 펄스아시아가 7월 벌인 여론조사에서 두테르테 대통령 신뢰율이 91%에 달한 것이 이를 대변한다. SWS가 9월 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76%가 두테르테 대통령에 대해 만족을 표시했으며 11%만 불만족을 드러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대통령 전용기는 응급환자 이송에 쓰라며 국적 여객기를 이용하고 티셔츠 등 격식 없는 복장으로 현장을 누비며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것도 인기요인이다.
그러나 필리핀 안팎의 우려 또한 커지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유럽연합(EU) 등이 잇따라 필리핀의 인권 상황에 우려를 표명하며 초법적 처형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두테르테 대통령은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며 막말로 대응했다. 마약 소탕전을 독일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비유했다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필리핀 안에서도 무자비한 마약 전쟁에 대한 공포감이 일고 있다.
70만 명 이상의 마약 용의자가 자수한 가운데 무고한 인명 피해도 속출한다. 8월 말 필리핀 북부 다구판 시에서 5세 여아가 마약 용의자를 노린 괴한의 총기 난사 과정에서 유탄에 맞아 숨졌다.
루비 기간테(31)는 자신의 오빠(34)가 귀가 중에 마약상으로 몰려 경찰 총에 맞아 죽었다며 두테르테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것을 후회한다고 dpa 통신에 말했다. 필리핀 정부가 경찰관들로 암살단을 운영하며 마약사범을 비밀리에 제거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필리핀의 외교정책도 대폭 수정하고 있다.
친미 외교 노선을 버리고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겪는 중국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다. 러시아에도 손을 내민다. 중국, 러시아와 경제 협력 확대 뿐 아니라 무기 구매도 검토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반미 행보는 미국과 인권문제로 대립하면서 속도를 내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미국과의 합동순찰, 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데 이어 24년 만에 미군의 필리핀 재주둔을 허용하는 양국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의 폐기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내 시절(임기)에 미국과 결별할지도 모른다"며 단교도 불사할 수 있다는 입장까지 밝혔다.
그는 "미국이 (필리핀에서) 쿠데타를 부추길지도 모른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나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보고를 접했다"고 말하는 등 미국에 대한 경계감도 드러냈다.
이를 놓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외교 지평을 중국, 러시아로 확대해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실리를 챙기는 등거리 외교를 추구한다는 평가가 있지만 급격한 정책 변화로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미국과 수십 년간 끈끈한 연대를 과시한 군부의 불만이 거론된다.
안토니오 트릴라네스 필리핀 상원의원은 쿠데타를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 일부 군 간부가 미국에 대한 두테르테 대통령의 단교 위협에 대해 우려한다고 현지 언론에 전했다.
델핀 로렌자나 필리핀 국방장관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미국과의 합동군사훈련이나 방위 협정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받았을 수 있다며 국내외 안보위협에 대처하는 데 미군의 지원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알베르토 델 로사리오 전 필리핀 외무장관은 "두테르테 정부의 외교전략이 궤도를 다소 벗어났다"며 "외교는 제로섬 게임이 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국제관계에서 가능한 많은 친구를 확보해야지 한 친구를 희생하면서 다른 친구를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필리핀대의 제이 바통바칼 해사법연구소장은 미군의 역할론을 인정하면서도 "대부분 필리핀인은 미국과 동등한 동반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지적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외교정책 변경으로 동남아시아 안보지형의 변화가 예상되자 미국은 필리핀과 동맹관계가 견고하다면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반면 중국은 내심 반기고 있다.
최근 고성장세를 구가하는 필리핀 경제에는 '두테르테 변수'가 떠오르고 있다.
코트라 마닐라무역관에 따르면 필리핀 경제는 1분기 6.8%에 이어 2분기 7.0% 성장했다. 필리핀 정부는 올해 성장률을 목표치 6∼7%보다 높은 6.5∼7.5%로 기대하는 등 낙관론을 펴고 있다.
그러나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최근 두테르테 정부의 정책 불안정성, 유혈 마약 소탕전이 필리핀 경제와 투자등급에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9월 말 필리핀 통화인 페소화 가치는 외국인 투자자의 주식 매도공세 등으로 7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세계은행은 올해 필리핀 경제의 성장률을 6.4%로 전망하고 필리핀 당국에 정책 신뢰 환경의 조성을 촉구했다.
필리핀 일간 인콰이어러넷은 5일 자 사설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의 '반미, 친중' 노선, 마약 전쟁 논란 등으로 전임 정부 때 '아시아의 병자'에서 벗어난 필리핀이 미국, EU 등과의 교역에서 큰 손실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일본에 이어 필리핀의 제2위 수출시장이며 미국은 필리핀의 최대 외국인 투자국이다. 필리핀은 미국과 EU의 경제 원조에도 의존하고 있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는 미국과 EU가 두테르테 정부에 원조 중단 가능성을 경고할 것을 요구했으며 미국 의회에서는 같은 움직임이 있다.
레니 로브레도 필리핀 부통령은 "국제사회의 많은 지원을 기대하고 있는데 상황이 악화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두테르테 대통령의 언행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에르네스토 아벨라 필리핀 대통령궁 대변인은 두테르테 대통령 취임 100일을 앞두고 마약 소탕전이 '극적인 진전'을 이룰 정도로 성공적이고 부패척결 운동으로 사업 인가 절차가 간소화되는 등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자평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취임 3∼6개월로 계획한 유혈 마약 소탕전을 6개월 연장하며 이를 비판하는 미국의 경제·방위 지원이 없어도 중국과 러시아의 손을 잡으면 된다는 인식을 보여 서방과의 갈등은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연합뉴스)